[버핏의 마지막 주주 서한 전문] “청소부도 회장과 똑같은 인간입니다”

워런 버핏이 버크셔 해서웨이 회장으로서 쓴 마지막 공개 서한이 미국 현지 시각 11월 10일 추수감사절에 발표되었다. 가족 재단 네 곳에 13억 달러어치의 버크셔 주식을 기부했다는 보도자료 이후 버핏은 “이제 나는 조용히 물러난다”고 썼지만, 그 말투엔 여전히 특유의 유머와 온기가 배어 있다. 이건 번역가가 서한 전문을 우리말로 옮겼다. ― 버핏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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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크셔 해서웨이

보도자료

즉시 배포용              2025년 11월 10일

오마하, 네브래스카(BRK.A; BRK.B)


오늘 워런 버핏은 가족 재단 네 곳에 기부하려고 A주 1,800주를 B주 270만 주로 전환하였습니다. 수전톰슨버핏재단에 150만 주, 셔우드재단과 하워드버핏재단, 노보재단에 각각 40만 주입니다. 이 기부는 오늘 완료됐습니다.

버핏이 주주 여러분께 드리는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주주 여러분께:

이제 나는 버크셔 연차보고서를 쓰거나 주주총회에서 끝없이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영국식 표현을 빌리자면 “조용히 지내려” 합니다.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연말에 그레그 에이블이 새 대표가 됩니다. 그는 뛰어난 경영자이자 지칠 줄 모르는 일꾼이며, 정직하게 소통하는 사람입니다. 그가 오래도록 재임하길 기원합니다.

나는 해마다 추수감사절 메시지를 통해서 여러분과 내 자녀들에게 버크셔 이야기를 계속 전할 생각입니다. 버크셔의 개인 주주들은 자신의 이익을 불우한 이들에게 매우 너그럽게 나누어준다는 점에서 매우 특별한 집단입니다. 나는 여러분과 계속 소통할 수 있어서 기쁩니다. 올해는 먼저 잠시 회상에 빠져보겠습니다. 그리고서 나의 버크셔 주식 분배 계획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끝으로 사업에 관한 생각과 개인적 소견 몇 가지를 덧붙이겠습니다.


추수감사절이 다가오니, 내가 95세까지 살아 있다는 행운이 놀랍고도 고맙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내가 95세까지 살 가능성이 크지 않았습니다. 한참 일찍 죽을 뻔했거든요.

1938년이었습니다. 당시 오마하 시민들은 병원을 가톨릭 병원과 개신교 병원으로 구분했는데 당시에는 자연스러운 구분이었습니다.

우리 집 주치의 할리 하츠 선생님은 검은 가방을 들고 왕진을 다니던 다정한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하츠 선생님은 나를 ‘철부지’라고 불렀고 왕진비도 많이 받지 않았습니다. 1938년 내가 심한 복통을 겪었을 때, 하츠 선생님이 들러 잠깐 진찰해보고는 아침이면 괜찮아질 거라고 했습니다.

선생님은 집으로 돌아가 저녁을 먹고 브리지 게임을 했습니다. 하지만 나의 다소 특이한 증상이 마음에 걸렸던지, 그날 밤늦게 나를 세인트 캐서린 병원으로 보내 응급 맹장 수술을 받게 했습니다. 이후 3주 동안 나는 마치 수녀원에 들어온 기분이었고, 내게 생긴 “연단”을 즐기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말하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때도 그랬지요.) 수녀님들은 그런 나를 따뜻이 받아주었습니다.

게다가 담임이던 3학년 매드슨 선생님은 반 친구 30명 모두 내게 편지를 쓰게 했습니다. 아마 남자아이들의 편지는 내다 버렸지만 여자아이들의 편지는 몇 번이고 읽었을 겁니다. 입원 생활에도 나름의 보상이 있었지요.

실제로 입원 첫 주는 위험했습니다. 그러나 입원 기간 중 가장 기뻤던 것은 멋진 이모 에디가 준 선물이었습니다. 그것은 아주 전문적으로 보이는 지문 채취 세트였는데, 나는 곧바로 담당 수녀님들의 지문을 몽땅 채취했습니다. (아마 나는 그 가톨릭 병원에 입원한 첫 번째 개신교 아이여서 수녀님들이 나의 행동을 예상하지 못했겠지요.)

나는 전혀 터무니없는 생각을 했습니다. 언젠가 어느 수녀가 범죄를 저지를 것이고, FBI는 수녀의 지문이 없음을 깨닫게 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1930년대에 FBI와 에드거 후버 국장은 국민의 존경을 받고 있었습니다. 나는 후버 국장이 몸소 오마하로 와서 나의 소중한 지문 컬렉션을 살펴보는 장면을 상상했습니다. 더 나아가 후버 국장과 내가 그 수녀를 특정하여 검거하는 모습까지 상상했습니다. 전국적인 명성이 확실해 보였지요.

물론 그런 공상은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몇 년 뒤 직권 남용으로 명예가 실추된 사람은 바로 후버 국장이었습니다. 내가 지문을 채취했어야 할 사람은 후버 국장으로 밝혀졌습니다.

그것이 1930년대 오마하였습니다. 나와 친구들이 썰매, 자전거, 야구 글러브, 전기 기차를 탐내던 시절이었지요. 이제 그 시절에 아주 가까운 곳에서 자라 내 인생에 큰 영향을 주었지만, 오랜 기간 내가 그 존재조차 몰랐던 몇몇 아이들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64년 지기 최고의 친구, 찰리 멍거로 시작하겠습니다. 1930년대에 찰리는 내가 1958년부터 지금까지 소유하면서 살아온 집에서 한 블록 떨어진 곳에 살았습니다.

초기에 나는 찰리와 친해질 기회를 아슬아슬하게 놓쳤습니다. 나보다 6.7세 많은 찰리는 1940년 여름에 내 할아버지의 식료품점에서 하루 10시간 일하고 2달러를 받았습니다. (검약은 버핏 집안의 뿌리 깊은 전통입니다.) 이듬해 나도 그 가게에서 비슷한 일을 했지만, 1959년이 되어서야 찰리를 만났습니다. 당시 그는 35세, 나는 28세였습니다.

찰리는 2차 대전 복무를 마치고 하버드 로스쿨을 졸업한 뒤 캘리포니아로 완전히 이주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오마하에서 보낸 어린 시절이 자신을 만들었다고 줄곧 말했지요. 60여 년 동안 찰리는 내게 엄청난 영향을 주었고, 더없이 훌륭한 스승이자 자상한 ‘형’이었습니다. 우리 사이에 의견 차이는 있었어도 다툰 적은 없었습니다. “내 말이 맞았지”라는 말은 그의 사전에 없었습니다.

1958년에 나는 생애 처음이자 하나뿐인 집을 샀습니다. 물론 오마하였습니다. 내가 자란 곳에서 약 2마일, 처가와는 두 블록 이내, 버핏 식료품점에서는 약 여섯 블록, 그리고 내가 64년간 일해온 사무실 건물까지는 차로 6~7분 거리였습니다.

다음은 오마하의 또 다른 인물, 스탠 립시입니다. 스탠은 1968년 오마하 선 신문(주간지)을 버크셔에 매각했고, 10년 뒤 내 부탁으로 버펄로로 이직했습니다. 당시 버크셔 계열사가 소유한 버펄로 이브닝 뉴스는 버펄로에서 유일한 일요판을 내던 조간 신문사와 사생결단 전쟁을 치르는 중이었는데, 우리가 밀리고 있었습니다.

스탠은 마침내 새로운 일요판을 만들어냈고, 적자에 시달리던 우리 신문은 3,300만 달러 투자액에 대해 세전 수익률 연 100%가 넘는 실적을 여러 해 거뒀습니다. 이는 1980년대 초 버크셔에 매우 중요한 자금이었습니다.

스탠은 내 집에서 약 다섯 블록 떨어진 곳에서 자랐습니다. 그의 이웃 중 한 사람은 월터 스콧 주니어였지요. 기억하시겠지만 월터는 1999년 미드아메리칸 에너지를 버크셔에 안겨주었습니다. 그는 2021년 타계할 때까지 버크셔의 소중한 이사였고 나의 절친이었습니다. 월터는 수십 년 동안 네브래스카의 자선 활동을 이끌었으며, 오마하와 주 전체에 그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월터는 벤슨고등학교에 다녔는데 원래 나도 그 학교에 갈 예정이었습니다. 아버지가 1942년 연방 하원 선거에서 4선 현역을 꺾고 깜짝 승리를 거두기 전까지는 말이죠. 인생은 놀라움의 연속입니다.

아직 더 있습니다.

1959년, 돈 키오는 젊은 가족과 함께 내 집 바로 맞은편, 그리고 멍거 가족이 살던 곳에서 약 100야드 떨어진 집에 살았습니다. 당시 돈은 커피 영업사원이었지만, 훗날 코카콜라의 사장이자 버크셔의 헌신적인 이사가 되었습니다.

내가 처음 만났을 때 돈의 연봉은 1만 2,000달러였고, 아내 미키와 함께 다섯 아이를 키우고 있었습니다. 모두 (등록금을 내는) 가톨릭 학교에 갈 예정이었지요.

우리 두 가족은 금세 가까워졌습니다. 돈은 아이오와주 북서부의 농장 출신으로서 오마하의 크레이턴대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일찍이 그는 오마하 출신인 미키와 결혼했고, 코카콜라에 합류하여 세계적으로 전설적인 인물이 되었습니다.

돈이 코카콜라 사장이던 1985년, 회사는 불운을 가져온 ‘뉴 코크’를 출시했습니다. 돈은 대중에게 사과하면서 ‘오리지널’ 코크를 부활시키겠다는 유명한 연설을 했습니다. 그는 “최고의 바보 귀하”라고 쓴 편지는 곧장 자기에게 배달된다고 설명하고 나서 마음을 바꿨습니다. 그의 ‘철회’ 연설은 고전이 되었고 유튜브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코카콜라 제품은 실상 회사 것이 아니라 대중의 것이라고 기꺼이 인정했습니다. 그 뒤 매출이 급증했습니다.

찰리로즈닷컴(CharlieRose.com)에서 돈의 멋진 인터뷰를 보실 수 있습니다. (톰 머피와 케이 그레이엄의 보석 같은 인터뷰도 있습니다.) 찰리 멍거처럼 돈은 평생 중서부 소년다운 열정과 친근함, 그리고 미국적 기질을 간직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인도에서 태어나 자란 아지트 자인과, 우리 차기 CEO인 캐나다 출신 그레그 에이블도 20세기 말 몇 년 동안 오마하에서 살았습니다. 사실 1990년대에 그레그는 내 집에서 몇 블록 떨어진 파넘스트리트에서 살았지만 그때는 서로 알지 못했지요.

오마하의 물에는 무슨 마법 성분이라도 있는 걸까요?


십대 시절 몇 해는 워싱턴 D.C.에서 보냈습니다(아버지가 의회에 계실 때였지요). 1954년에는 맨해튼에서 종신직이라고 생각했던 일을 했습니다. 거기서 나는 벤저민 그레이엄과 제리 뉴먼에게 훌륭한 대우를 받았고, 평생 가는 친구를 많이 사귀었습니다. 뉴욕에는 독특한 장점이 있었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그런데도 1956년, 겨우 1년 반 만에 나는 오마하로 돌아왔고, 다시는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후 내 세 자녀와 몇몇 손주도 오마하에서 자랐습니다. 내 자녀들은 항상 공립학교에 다녔습니다. 1921년에 졸업한 나의 아버지가 다니던 고등학교였고, 1950년에 졸업한 제 첫 아내 수지가 다니던 고등학교였습니다. 찰리, 스탠 립시, 그리고 네브래스카 퍼니처 마트를 키운 핵심 인물 어브 블럼킨과 론 블럼킨도 같은 고등학교를 나왔습니다. 내셔널 인뎀너티를 창업하여 1967년 버크셔에 매각함으로써 우리 거대한 손해보험 사업의 토대를 세운 잭 링월트(1923년 졸업)도 같은 고등학교를 나왔습니다.


우리나라의 수많은 훌륭한 기업, 학교, 의료기관에는 고유한 강점과 재능을 갖춘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나는 큰 행운을 누렸습니다. 평생 가는 친구를 다수 사귀었고, 두 아내를 만났으며, 공립학교에서 처음부터 훌륭한 교육을 받았고, 아주 어린 시절 흥미롭고 다정한 오마하 어른을 많이 만났으며, 네브래스카주 주 방위군에서 다양한 친구를 사귀었습니다. 한마디로 네브래스카는 내 삶의 터전이었습니다.

돌이켜보면 내가 다른 곳에 살았더라면 나도 버크셔도 지금만큼 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미국의 중심부는 태어나서 가정을 이루고 사업을 일구기에 매우 좋은 곳이었습니다. 터무니없이 큰 행운을 타고난 셈이지요.


이제 내 고령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내 집안 유전자가 특별히 큰 도움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가족의 최장수 기록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기록이 흐릿해지긴 하지만) 내가 세우기 전까지 92세였습니다. 하지만 나는 하츠 선생님을 시작으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현명하고 다정하며 헌신적인 오마하 의사들을 만났습니다. 이분들은 내 생명을 적어도 세 번 구해주셨는데, 모두 내 집에서 몇 마일 안에 거주했습니다. (이제 간호사들의 지문 채취는 중단했습니다. 95세면 별별 기행이 어느 정도는 용납되지만… 그래도 한계는 있지요.)


노년에 이르려면 엄청난 행운이 필요합니다. 미끄러운 바나나 껍질, 자연재해, 음주 운전자나 한눈파는 운전자, 벼락 등을 매일 피해 다녀야 하니까요.

하지만 행운의 여신은 그야말로 변덕스럽고 터무니없이 불공평합니다. 지도자들과 부자들은 좀처럼 인정하지 않지만, 이들은 대개 과분한 행운을 받았습니다. 대대로 부유한 상속인들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평생 재정적 독립을 얻습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어린 시절부터 지옥 같은 환경에 내던져지거나, 더 나쁘게는 신체적·정신적 장애에 시달리면서 평범한 생활조차 누리지 못합니다. 세계의 인구 밀집 지역에 태어났다면 내 삶은 비참했을 것이고 내 누이들의 삶은 더 비참했을 겁니다.

1930년 나는 건강하고 적당히 영리한 백인 남성으로 미국에서 태어났습니다. 와! 행운의 여신에게 감사할 따름입니다. 누이들은 나와 같은 지능에 성품은 더 나았지만 앞날은 전혀 달랐습니다. 행운의 여신은 내 인생 대부분 기간에 계속 찾아왔지만, 이제는 90대 노인을 계속 찾아올 만큼 한가하지 않습니다. 운에도 한계가 있지요.

반면 시간 할아버지는 내가 나이를 먹을수록 내게 더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는 패배를 모릅니다. 모든 시합은 그의 승리로 끝납니다. 균형 감각, 시력, 청력, 기억력이 꾸준히 내리막을 타기 시작하면 시간 할아버지가 근처에 와 있다는 뜻입니다.

나는 노년기가 늦게 시작했지만 (시작 시점은 사람마다 크게 다릅니다) 한번 시작되면 거부할 수가 없습니다.

놀랍게도 나는 대체로 기분이 좋습니다. 움직임은 느리고 독서는 점점 힘들어지지만, 주 5일 사무실에 가서 훌륭한 사람들과 함께 일합니다. 가끔은 쓸 만한 아이디어가 떠오르거나, 평소라면 받지 못했을 제안을 받기도 합니다. 버크셔의 규모와 시장 수준 탓에 아이디어는 많지 않지만, 그래도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예상 밖으로 장수하면 내 가족과 자선 목표 달성에 필연적으로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함께 살펴보지요.

향후 계획

내 자녀들은 모두 일반 은퇴 연령을 넘었습니다. 각각 72, 70, 67세이지요. 지금 여러 면에서 전성기이긴 하지만, 셋 모두가 나처럼 ‘노년기가 늦게 시작되는’ 예외적 행운을 누릴 것이라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예비 수탁자들로 교체되기 전에 내 전 재산을 그들이 처분할 가능성을 높이려면, 세 재단에 대한 생전 기부 속도를 높여야 합니다. 내 자녀들은 지금 경험과 지혜 면에서 전성기이지만 아직 노년기는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그 ‘밀월 기간’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다행히 진로 수정은 어렵지 않습니다. 다만 한 가지 더 고려할 점이 있습니다. 찰리와 내가 오랫동안 그레그를 신뢰했듯이 주주들도 그레그를 신뢰할 때까지 나는 A주 상당량을 계속 보유하고자 합니다. 신뢰 형성에 필요한 기간은 길지 않을 것입니다. 내 자녀들은 이미 100% 그레그를 지지하며 버크셔 이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세 자녀 모두 큰 재산을 분배할 만한 성숙함, 지성, 에너지, 직관을 갖추었습니다. 내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그들은 땅 위에 있을 테니, 필요하다면 연방 세제나 자선 활동에 영향을 미치는 다른 변화에 선제적·대응적 정책을 취할 수도 있습니다. 주변 세계의 중대한 변화에 적응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사후 통치는 실적이 좋지 않은 법이므로 나는 사후 통치를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다행히 세 자녀 모두 주로 어머니의 유전적 장점을 물려받았습니다. 수십 년 동안 나도 그들의 생각과 행동에 본보기가 되었지만 절대 어머니와 동등한 수준은 아닙니다.

자녀들에게는 조기 사망이나 장애에 대비해 세 명의 예비 수탁자가 있습니다. 예비 수탁자들 사이에는 순위가 없으며 이들은 특정 자녀에게 지정되지도 않았습니다. 세 사람 모두 비범하고 세상 물정에 밝으며, 이해 상충이 없습니다.

나는 자녀들에게 기적을 이룰 필요도 없고 실패나 실망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고 장담했습니다. 실패나 실망은 불가피하며 나도 충분히 겪었습니다. 다만 정부 활동이나 민간 자선 활동이 일반적으로 달성하는 수준보다 조금이라도 높으면 됩니다. 물론 그런 부의 재분배 방식에도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면서 말이죠.

처음에 나는 여러 거창한 자선 계획을 구상했습니다. 나는 고집을 부렸지만 실행할 수가 없었습니다. 오랜 세월 나는 정치꾼들의 분별없는 재산 이전, 세습적 선택, 그리고 서투르거나 기이한 자선 활동 사례도 지켜보았습니다.

내 자녀들이 그저 성실히 해내기만 해도 아내와 나는 기쁠 것입니다. 자녀들은 직관이 훌륭하며, 처음에는 아주 적은 금액으로 시작해서 나중에는 연간 5억 달러가 넘는 규모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 실전 경험을 쌓았습니다.

세 자녀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남을 돕는 일에 기꺼이 긴 시간을 사용합니다.


세 재단에 대한 생전 기부 속도를 높이는 것은 버크셔에 대한 나의 전망이 바뀌어서가 절대 아닙니다. 그레그 에이블은 내가 차기 CEO로 처음 생각했을 때의 높은 기대를 이미 뛰어넘었습니다. 그는 우리 사업과 인재를 지금의 나보다 훨씬 잘 이해하고, CEO들이 생각조차 하지 않는 주제도 매우 빨리 익힙니다. 여러분과 내 재산을 맡길 인물로 그레그보다 나은 CEO·컨설턴트·학자·공직자 그 누구도 나는 떠올릴 수 없습니다.

예컨대 그레그는 우리 손해보험 사업의 성장 잠재력과 위험을 수많은 베테랑 임원보다 훨씬 더 잘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가 앞으로 수십 년간 건강하기를 바랍니다. 약간의 행운이 따른다면 버크셔는 다음 한 세기 동안 CEO가 5~6명이면 족할 것입니다. 그러려면 특히 65세 은퇴를 목표로 하거나, 과시형 부자가 되려 하거나, 가문을 일으키려는 사람은 피해야 합니다.

불편한 현실도 있습니다. 때로는 모회사나 자회사의 훌륭하고 충직한 CEO가 치매, 알츠하이머병 등 심각한 장기 질환에 굴복하기도 합니다.

찰리와 나는 이런 문제를 여러 차례 겪고도 대응하지 못했습니다. 이 실패는 큰 실수가 될 수 있습니다. 이사회는 CEO가 이렇게 될 가능성을 늘 경계해야 하고, CEO는 자회사들에서 이런 사건이 발생할 가능성을 경계해야 합니다. 이는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과거에 여러 대기업에서도 이런 사례가 있었습니다. 조언하건대 이사들은 경계하면서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내 평생 개혁가들은 CEO의 보수를 평균 직원과 비교해서 공개하도록 요구함으로써 CEO들을 망신 주려 했습니다. 그 결과 예전에 20페이지 내외였던 위임장 설명서는 100페이지가 넘는 수준으로 불어났습니다.

하지만 선의는 통하지 않았고 오히려 역효과를 냈습니다. 내가 본 대부분 사례에서 A사의 CEO는 경쟁사인 B사 CEO의 보수를 보더니 자신이 더 받아야 한다고 이사회에 은근히 신호를 보냈습니다. 물론 그는 이사 보수도 올리고 보상위원회도 신중하게 구성했습니다. 새 규정은 절제 대신 질투를 낳았습니다.

이 인상 압박은 스스로 생명을 얻었습니다. 매우 부유한 CEO들 역시 인간이므로, 다른 CEO들이 더 큰 부자가 되는 모습이 불편했습니다. 질투와 탐욕은 동반자입니다. CEO나 이사회 보수를 대폭 삭감하라고 권한 컨설턴트가 과연 있었던가요?


종합하면 버크셔의 사업 전망은 평균보다 다소 나은 수준이며, 상관관계가 낮은 보석 같은 대형 사업 몇 개가 실적을 선도합니다. 다만 10년, 20년 뒤에는 버크셔보다 실적이 좋은 기업도 많을 것입니다. 우리는 덩치가 큰 탓에 그만한 대가를 치릅니다.

버크셔가 파국적 재난을 겪을 가능성은 내가 아는 어떤 기업보다도 낮습니다. 그리고 버크셔의 경영진과 이사회는 주주 의식이 내가 아는 수많은 회사보다 강합니다. 끝으로 버크셔는 미국에 보탬이 되는 방식으로 항상 운영될 것이며, 미국에 부담이 되는 처지로 전락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세월이 흐르면 우리 경영진은 매우 부유해질 것입니다. 그들은 중대한 책임을 지니까요. 그러나 가문을 세우거나 과시형 부자가 되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우리 주가는 변덕스럽게 움직일 것이며, 현 경영진 아래 지난 60년 동안 세 번 그랬듯이 때로는 약 50% 하락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낙담하지 마십시오. 미국은 회복할 것이고 버크셔 주가도 회복할 것입니다.

마지막 생각 몇 가지

자기 변명처럼 들릴지 모르겠습니다만, 나는 인생 전반부보다 후반부에 더 만족한다고 기꺼이 말할 수 있습니다. 조언하건대, 지나간 실수로 자신을 책망하지 마십시오. 실수로부터 조금이라도 배우고 앞으로 나아가면 됩니다. 아무리 늦더라도 나아질 수 있습니다. 올바른 영웅을 찾아내서 본받으세요. 톰 머피부터 시작해도 됩니다. 그는 최고였습니다.

노벨상으로 유명해진 알프레드 노벨을 떠올리십시오. 노벨은 형이 죽었을 때 신문사가 혼동하여 실은 자신의 부고를 읽고 경악했으며, 자신의 행동을 바꿔야 한다고 깨달았다고 합니다.

신문사의 실수에 기대지 마십시오. 당신의 부고가 어떻게 쓰이길 원하는지 정하고, 그에 합당한 삶을 사십시오.

위대함은 막대한 돈, 엄청난 명성, 막강한 통치 권력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수많은 방법 중 하나로 누군가를 돕는다면 당신은 세상을 돕는 것입니다. 친절은 비용이 들지 않으면서도 더없이 귀중합니다. 종교가 있든 없든, 행동 지침으로는 이 황금률이 으뜸입니다.

나는 무수히 경솔했고 수많은 실수를 저질렀지만, 훌륭한 친구들에게서 더 나은 태도를 배우는 행운도 누렸습니다(아직도 완벽과는 거리가 멉니다). 청소부 아주머니도 회장과 똑같은 인간임을 잊지 마십시오.


이 글을 읽는 모든 분께 즐거운 추수감사절을 기원합니다. 심술궂은 이들에게도요. 아무리 늦더라도 변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기회를 극대화해준 미국에 감사하십시오. 다만 미국의 보상 배분 방식은 (필연적으로) 변덕스럽고 때로는 부패하기도 합니다.

여러분의 영웅을 매우 신중히 선택해서 본받으십시오. 절대 완벽해질 수는 없지만, 언제나 더 나아질 수는 있습니다.


버크셔에 대하여

버크셔 해서웨이와 그 자회사들은 보험 및 재보험, 공익사업과 에너지, 화물 철도 운송, 제조, 서비스, 소매 등 다양한 사업을 영위합니다. 당사 보통주는 뉴욕증권거래소에 상장되어 있으며, 종목 코드는 BRK.A와 BRK.B입니다.

-끝-

문의
마크 D. 햄버그
402-346-14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