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크셔 통신 5] 내부에서 본 버크셔의 조직문화
버크셔 해서웨이 그룹에서 근무하는 유일한 한국인인 필자가 바라본 워런 버핏은, 위대한 투자자이기 이전에 탁월한 경영자다. 그의 철저한 경영 방식은 투자 원칙과 분리되지 않고 하나의 체계로 이어진다. 버핏의 가치평가 원칙이 현장 경영과 기업 문화에 어떻게 적용되는지 살펴보며, 그가 왜 단순한 투자자가 아니라 성공적인 경영자인지 한국 독자에게 전하고자 한다. ― 버핏클럽
사회생활을 시작한 뒤 처음 몇 년은 인생에서 잊지 못할 시기로 남는다. 평생 학생으로만 살다가 처음으로 사회라는 무대에 서기 때문이다. 이 기간에 만족스러운 경험을 했거나, 적어도 나쁜 경험을 피했다면 흔치 않은 행운아다.
사회는 그만큼 만만치 않은 곳이다. 어리다고 떠먹여주거나 너그러이 봐주는 경우는 거의 없다. 오히려 익숙하지 않다거나 서툴다는 이유로 더 꾸중을 듣고, 뼈아픈 성장통을 겪기도 한다. 심하게는 사기나 착취를 당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이러다 보니 현실에서는 인수인계만 제대로 해줘도 꽤 괜찮은 회사이자 상사라는 말도 나온다. 국가기관이나 공기업조차 인수인계로 고생하는 경우가 잦다고 들었다. 대기업은 이직을 우려해 초기에는 스트레스를 덜 주지만 신입 딱지를 떼면 조직문화나 업무로 압박이 커지기 마련이다.
나는 버크셔 해서웨이의 재보험 계열사 BHSI에서 근무한다. BHSI에는 재보험사 특유의 일희일비하지 않는 진중한 문화가 있는데, 내가 보기엔 버크셔 그룹 전체의 안정적인 조직문화와도 맞닿아 있다. 물론 계열사마다 업무 방식과 분위기는 다를 수 있다는 점은 참고하시기 바란다.
BHSI에서는 신입사원이 적어도 불안한 마음으로 회사를 다니지는 않는다. 최소한 사원이나 대리에게는 예상 가능한 범위 내에서 처리할 수 있는 업무가 주어진다.
신입이 겪는 가장 흔한 고충은 커뮤니케이션이다. 고객과 거래처 등 외부 소통도 있지만 내부 소통의 비중이 훨씬 크다. 상사와 대화하는 방식, 지나가듯 얘기한 지시를 메모하는 일, 하나를 들으면 둘을 알아채는 눈치, 오해 없이 협의하는 맥락 읽기. 경험이 부족한 신입에게는 어느 하나 쉬운 일이 없다.
모든 회의를 녹화하고 기록하는 이유
우리 회사는 거의 모든 회의를 화상으로 진행한다. 팀원이 전부 출근한 날에도 마찬가지다. 같은 팀이라 누군가는 해외나 멀리 떨어진 지사에 있는 경우가 많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팀원이 요청하면 얼마든지 녹화할 수 있다. 이렇게 하면 마치 온라인 강의를 다시 보듯이 회의를 돌려 보며 업무 내용, 지시 사항, 매뉴얼을 반복해서 확인할 수 있다.
후임 입장에서는 내용을 애매하게 기억하다가 사고를 내거나, 기록하지 못해서 다시 물어보거나, 지시 사항을 빼먹을까 봐 불안해할 필요가 없다. 선임 입장에서도 회의 때 알려줬거나 지시한 내용을 반복하지 않아도 되니 편하다. 누가 어떤 내용을 지시하고 설명했는지를 두고 불필요한 오해가 생길 일도 없다.
회의 녹화는 존중하는 분위기를 유지하는 데도 큰 역할을 한다. 회의 시간에 고함, 인격 모독, 차별적 언행이 오갔다면 윤리팀이나 인사팀에 신고할 수 있는 명백한 현장 물증이 되기 때문이다. 소송의 나라 미국에서는 특히 이런 부분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업무용 문자 메시지를 활용하는 빈도도 매우 높다. 특히 리스크팀, 가치평가팀, 계리팀처럼 내부 직원을 주로 상대하는 부서는 커뮤니케이션의 상당 부분을 문자로 처리한다. 팀장과 과장이 바로 옆 파티션에 앉아 있어도 업무 협의나 지시, 질문을 사내 문자로 주고받을 정도다.
이런 방식은 선호도가 갈릴 수 있지만, 신입 입장에서는 지시 사항이 헷갈리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이해가 안 될 때 문자 기록을 다시 찾아보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부수적으로 서로 존중하는 문화에도 기여한다. ‘말투’로 인한 오해를 차단해주기 때문이다. 게다가 말과 달리 문자는 보내기 전에 생각할 시간이 있고 수정도 가능하다. '기분이 태도로 번져서' 감정이 상하는 일을 방지한다.
처음에는 키보드 소리만 가득한 사무실이 너무 냉랭하다고 느낄 때도 있었다. 회사가 아니라 도서관인 듯한 기분이 들 때도 있었다. 내성적인 사람에게는 이만한 문화가 없겠지만 외향적인 사람에게는 지루하지 않을까 염려될 정도였다.
그러나 물어본다고 해서 페널티가 있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안심이 되었다. 업무 기록을 꼼꼼히 돌려 보면 답이 다 있는데도 왜 잊었냐, 왜 헷갈렸냐고 질책하지 않았다. 신입은 질문하거나 제안하기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상사들은 하나같이 강조했다.
이런 기록 문화는 신입이 보조가 아니라 주요 업무를 맡는 출발점이기도 하다. 내가 속한 가치평가팀의 업무는 막대한 금액을 다루는 보험 인수 프로세스의 첫 단계이며, 그중에서도 사원, 대리급이 하는 데이터 수집은 첫 단추다. 따라서 사원 한 명이 데이터 하나만 잘못 모아오거나 잘못 분석해도, 그 데이터를 기초로 판단해야 하는 상사의 업무까지 차질이 생긴다.
그렇다고 수천 개 데이터를 모으는 작업까지 상사가 일일이 체크하거나 직접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BHSI 같은 글로벌 재보험사에서는 경력 수년 차의 언더라이터 한 명이 수백억 원짜리 계약을 가져오는 고객이나 브로커를 상대한다. 리스크팀 사원 한 명이 분석한 데이터를 토대로 큰 금액이 걸린 판단을 내려야 한다. 팀장 같은 관리직이 모든 브로커를 일대일로 상대하거나 모든 리스크 요소를 직접 수집한다면, 복잡하고 거대한 보험 계약을 관리하는 일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마이크로 매니징 대신 지원하는 상사
우리 회사에서 상사의 역할은 팀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지원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팀을 책임지고 지도하긴 하지만, 카리스마라는 명목으로 폭군처럼 통제하거나 세부 사항까지 챙기고 지적하는 마이크로 매니징을 하지 않는다. 만약 팀원들에게 일일이 간섭하기 시작하고 작은 실수나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을 볼 때마다 화를 낸다면, 팀원들은 자연히 상사의 눈치를 보게 된다. 그런 방식이 종종 먹히기도 하지만, 대개는 두 가지 부작용이 발생한다.
첫째, 상사가 지나치게 밀어붙이면 직원의 충성도가 약해진다. 인격적으로 대우하지 않는 직장에 충성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동네 아르바이트라면 때려치우는 사람이 많겠지만, 어릴 때부터 힘들게 노력해 들어온 대기업이라 함부로 그만두지 못할 뿐이다.
하지만 미국처럼 이직이 자유로운 시장에서는 소송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직원들은 언제든 떠날 준비를 한다. 성과를 밀어붙이는 게 우선인 직장이라면 몰라도, 장기적인 리스크 관리가 더 중요한 기업에서 이런 상황은 치명적인 문제로 번질 수 있다.
손해보험이나 재보험사에선 은행이나 생명보험사처럼 핵심 부서의 몇 사람 선에서 리스크를 일괄적으로 계산할 수 없다. 각 분야의 전공자가 다년간 관련 지식과 노하우를 쌓아야 비로소 제 몫을 한다. 케이스마다 다른 종류의 리스크가 내포되어 있어 정량적인 계산이나 알고리즘이 아니라 정성적인 리스크 파악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즉 한 명의 인재를 키우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리고, 언더라이팅이나 리스크 등 노하우가 축적된 베테랑을 만드는 데에는 십 년이 넘는 시간과 막대한 비용이 들어간다.
이들을 쉽게 대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앞서 여러 차례 말했듯, 보험은 실적을 내면 끝이 아니다. 숙련된 리스크팀이나 언더라이터 없이 마구잡이로 보험 계약을 인수했다간 대기업도 순식간에 망할 수 있다.
이렇게 힘들게 키운 인재를, 비인격적인 대우나 사사건건 간섭으로 질리게 만들어 다른 회사로 보낸다? 좀 답답하다고 험하게 '갈구다가' 회사에 훨씬 큰 손해를 입히는 것이다. 버크셔처럼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비즈니스 모델을 지향하는 회사에서는 속도보다는 충성도가 더 중요할 수 있다.
둘째, 업무 자체에 차질이 생긴다. 직원을 통제하고, 마이크로 매니징 하며, 심지어 윽박지르면 일은 더 꼬인다. 상사나 팀장의 입장도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간다. 브로커 한 명 한 명과의 협상을 직접 챙기고 싶은 심정, 자료 하나하나를 자기가 수집해서 깔끔하게 마무리하고 싶은 심정이 왜 없겠는가. 게다가 능력을 인정받아 과장이 되고 부장이 된 사람들이니, 사원의 일 처리가 어설퍼 보이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매 순간 모든 것에 간섭하거나 훈계하면 업무 프로세스는 늦어질 수밖에 없다.
우리 회사는 신입이 알아서 눈치껏 따라오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상사 쪽에서 먼저 명확하게 지시하고 후임이 헷갈리지 않도록 기록을 남기려 애쓴다. 그래야 서로 존중하는 분위기가 유지되고 사원도 모르거나 실수했을 때 안심하고 보고할 수 있다. 회사를 향한 충성심은 구호가 아니라 안정감에서 온다. 그리고 안정감을 만드는 최선의 방법은 평소 서로의 기분을 배려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흔히 미국의 조직문화를 두고 ‘효율 중시’를 거론한다. 정중한 표현 등을 생략한 채 본론만 적고, 별다른 감정적 교류 없이 평가만 하는 대화 방식 말이다. 하지만 실상은 기계처럼 일하지는 않는다는 게 나의 소감이다. 서로 말끝마다 “생큐”를 붙이는 것이 기본이고, 어느 정도는 사적인 안부를 물어본 다음에 본론으로 들어가는 걸 기본적인 예의로 삼는다. 상사와 면담할 때 가장 먼저 듣는 질문은 “내가 도와줄 게 있을까?”, 두 번째가 “우리 회사에 만족하는가?”이다.
'회사니까 당연히 지시한 걸 해내야 한다'는 식이나 '우리는 최고니까, 대기업이니까 당신 말고도 인재는 많아' 같은 자의식 과잉인 태도는 보이지 않는다. 상사가 나를 평가하고 혼내고 해고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언제든 무엇이든 물어볼 수 있고, 도움이나 상담을 요청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안정감이 있다. 그래서 안심하고 일할 수 있다. 이것이 숫자로 드러나진 않지만 버크셔 그룹의 장기적인 리스크 관리와 안정성에 분명히 기여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