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런 버핏 딥다이브 1] 120억 달러 외환 베팅의 비밀: 버핏식 '썩은 치즈' 걸러내기
투자자에게 투자는 세상을 읽는 가장 정직한 방법이고, 워런 버핏의 글과 말은 세상을 바라보는 가장 투명하고 예리한 렌즈다. 우리는 그 결과만 보고, 치열한 과정과 맥락을 보지 못한 건 아닐까? 혼자선 길을 잃기 쉬운 버핏의 지혜 숲을, '버핏 광팬' 홍영표 변호사가 가이드로 나서 함께 걷는다. 인자한 오마하의 현인을 넘어 '냉혹한 승부사', '치밀한 전략가' 버핏을 만나는 흥미진진한 여정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한다. ― 버핏클럽
워런 버핏 심층 해설을 시작하며
서점에는 워런 버핏의 이름을 단 책이 넘쳐나고, “좋은 주식을 10년 이상 보유하라”, “자신이 아는 것에 투자하라” 같은 격언들은 상식처럼 통한다. 우리는 그를 ‘오마하의 현인’으로 기억하며, 그의 투자가 단순하고 명쾌할 것이라 짐작한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가장 오해받는 투자자 역시 워런 버핏이다. ‘명언 제조기’로서의 버핏 뒤에는 누구보다 냉철한 승부사, 복잡한 파생상품과 거시경제의 파도를 계산된 위험으로 넘나드는 치밀한 전략가가 숨어 있다. 우리는 그동안 그의 ‘결과’만 보았지, 그 결과를 만들어낸 치열한 ‘과정’과 ‘맥락’은 보지 못했다.
심층 해설 시리즈의 교재로 《워런 버핏 바이블 완결판》을 선정한 이유는 명확하다. 버핏이 수십 년간 직접 쓴 ‘주주서한’의 원문뿐 아니라, 전 세계 주주들의 질문에 답하는 ‘주주총회 Q&A(질의응답)’의 생생한 기록을 모두 담고 있기 때문이다. 주주서한이 버핏이 밤새 고민하며 다듬은 ‘정제된 교과서’라면, 주주총회 Q&A는 예고 없이 날아오는 질문에 즉석에서 답하는 ‘날것의 지혜’다. 1차 해설서와 요약본에서는 느낄 수 없는 그의 숨결과 고뇌, 그리고 영혼의 단짝 찰리 멍거와의 위트 있는 케미스트리가 고스란히 배어 있다.
하지만 이 책은 친절하지 않다.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낯선 회계 용어, 생소한 보험 산업의 구조, 1980~2020년대의 복잡한 미국 금융 역사가 거대한 벽처럼 가로막는다. “좋은 말인 건 알겠는데 도대체 무슨 상황이었지?”라는 의문이 들 때쯤, 책은 다시 책장 속 장식품으로 돌아가기 십상이다.
그래서 이 책을 단순히 읽는 것을 넘어 철저하게 ‘해부’하기로 했다. 목표는 활자 행간에 숨겨진 당시의 경제적 배경을 복원하고, 버핏이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맥락’을 짚어내는 것이다. 어려운 금융 용어를 일상의 언어로 번역하고, 딱딱한 숫자 뒤에 숨은 드라마를 끄집어낼 것이다. 단순히 “버핏이 이렇게 말했다”를 외우는 것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될 것이다.
• 버핏은 왜 2002년에 자신의 원칙을 깨고 외환시장에 베팅했을까?(주주서한의 배경)
• 찰리 멍거는 왜 그토록 신랄하게 월가의 탐욕을 비판했을까?(주주총회 Q&A의 속사정)
• 이들은 왜 특정 회계 지표(EBITDA)를 그토록 혐오했을까?(행간의 의미)
투자는 세상을 읽는 가장 정직한 방법이다. 그리고 워런 버핏의 글과 말은 그 세상을 바라보는 가장 투명하고 예리한 렌즈다. 혼자라면 길을 잃기 쉬운 이 두꺼운 지혜의 숲을, 친절한 가이드가 되어 함께 걷겠다. 우리가 알던 ‘착한 할아버지’ 버핏을 넘어 ‘냉혹한 승부사’ 버핏을 만나는 이 흥미진진한 여정에 여러분을 초대한다. 책장에서 먼지 쌓인 책을 꺼내자. 진짜 독서를 시작할 시간이다.
2002년 ‘썩은 치즈’와 ‘120억 달러’의 이중주
“거시경제를 예측하는 건 시간 낭비다.”
수십 년간 이 원칙을 종교처럼 지켜오던 ‘투자의 신’이, 어느 날 갑자기 120억 달러라는 천문학적인 돈을 들고 외환시장에 뛰어들었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마치 교황이 기도를 멈추고 복권을 산 것과 같은 이 충격적인 사건이 2002년 워런 버핏에게 실제로 일어났다.
도대체 무엇이 그를 변하게 했을까? 《워런 버핏 바이블 완결판》에 수록된 2002년과 2003년 주주서한을 현미경처럼 들여다보면, 이 사건은 단순한 돈벌이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썩은 치즈’가 넘쳐나던 광기의 시장에서, 오른손은 날카로운 창인 ‘외환’으로 공격하고 왼손은 가장 단단한 방패인 ‘현금’으로 방어하는 천재적인 양손잡이 전략이었다.
예언자들의 묘지와 ‘딥 스로트’의 조언
버핏은 평소 주주서한을 통해 “환율이나 금리를 맞히려는 예언자들의 묘지에는 방대한 구역이 배정되어 있습니다”라며 거시경제 예측가들을 냉소했다. 그런 그가 움직였다는 건 단순한 ‘예측’이 아니라 피할 수 없는 ‘현실’을 보았다는 뜻이다.
당시 미국 경제는 한도 초과된 신용카드로 돌려막기를 하는 것과 같았다. 구체적으로 2002년 미국의 무역 적자는 약 4,180억 달러에 달했고 재정 적자 또한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었다. 이를 경제 용어로 ‘쌍둥이 적자’라고 한다.
이때 버핏은 복잡한 경제 모델을 돌리는 대신, 워터게이트 사건의 내부 고발자 ‘딥 스로트(Deep Throat)’가 남긴 불멸의 조언을 따랐다.
“돈의 흐름을 따라라(Follow the money).”
미국이 전 세계의 돈을 빌려 흥청망청 소비하는 이 불균형 구조는 영원할 수 없으며, 결국 달러 가치 하락이라는 청구서가 날아올 것임을 직감한 것이다.
오른손의 창: 120억 달러 규모의 외환 선물과 ‘회계적 소음’
버핏의 행동은 신속하고 과감했다. 그는 보유하고 있던 달러를 팔고, 유로(Euro)를 포함한 5개국 통화를 사들이는 120억 달러 규모의 선물 계약을 체결했다.

사람들은 “버핏이 외환 투기꾼이 됐다”고 수군거렸지만 버핏의 생각은 달랐다. 당시 버크셔 해서웨이는 엄청난 양의 달러 현금성 자산을 보유하고 있었다. 만약 달러 가치가 폭락한다면 가만히 앉아서 자산의 구매력이 증발하는 셈이 된다.
“나는 외환 계약을 통해서 우리 포지션 일부라도 헤지해두어야 마음이 편합니다.”
버핏에게 이 거래는 투기가 아니라 자산 가치를 지키기 위한 ‘거대한 보험(hedge)’이었다. 하지만 여기엔 쓰라린 대가가 따랐다. 회계 규정상 외환 선물 계약은 매 분기 시장가치로 평가해야 했고, 그 등락 폭이 손익계산서의 ‘금융 및 금융상품(Finance and Financial Products)’ 항목에 즉각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버크셔의 분기 실적이 널뛰기를 했지만 버핏은 주주들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이 숫자는 회계적 변동일 뿐, 실제 경제적 가치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는 장부상의 소음(noise)을 무시하고 본질적인 방어선을 지키는 쪽을 택했다.
정교한 일격: 아마존 채권 투자의 묘수
버핏의 천재성이 가장 빛난 대목은 바로 ‘아마존(Amazon) 채권’ 투자였다. 당시 닷컴버블이 터지면서 아마존 채권은 시장에서 ‘쓰레기(Junk Bond)’ 취급을 받으며 액면가의 57% 수준으로 폭락해 있었다.
여기서 버핏은 일반적인 투자자와는 차원이 다른 설계를 보여준다. 그는 달러 채권이 아닌 ‘유로화 표시 채권’을 매수했다. 유로화 표시 채권이란 미국 기업인 아마존이 돈을 빌리되, 나중에 원금과 이자를 달러가 아닌 ‘유로화’로 갚기로 약속한 채권이다.
버핏은 이 상품 하나로 두 가지 베팅을 동시에 진행했다.
1. 신용 회복: 아마존이 망하지 않는다면 57달러에 산 채권을 100달러에 돌려받는다.(신용 차익)
2. 환차익: 달러가 약세로 가면 유로화로 받는 상환금의 가치는 더 커진다.(환율 차익)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아마존은 부활하여 채권 가격이 제자리로 돌아왔고 동시에 유로화 가치까지 급등했다. 남들이 공포에 떨 때, 버핏은 기업의 내재가치와 거시경제의 흐름을 결합해 이중의 안전마진을 확보한 것이다.
왼손의 방패: ‘썩은 치즈’와 ‘일드 헌팅’
지금까지가 버핏이 돈을 벌기 위해 취한 공격적인 포지션이었다면, 이제는 그가 남은 현금을 어떻게 지켰는지를 볼 차례다. 이 부분이야말로 버핏 투자철학의 백미다.
당시는 금리가 1%대인 초저금리 시대였다. 펀드매니저들은 단 0.1%의 수익이라도 더 내기 위해 눈에 불을 켰고, 수익률은 높지만 위험한 정크본드나 파생상품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이를 ‘일드 헌팅(Yield Hunting, 수익률 사냥)’이라 부른다.
버핏은 이를 보며 유명한 비유를 남겼다.
“수익을 위해 기준을 완화하는 행위는 가끔 유효 기간이 지난 치즈를 먹는 것과 같습니다.”
유효 기간이 갓 지난 치즈는 겉보기엔 멀쩡하고 맛도 괜찮다. 한두 번 먹어도 당장은 배가 아프지 않다. 하지만 계속 먹다 보면 결국 치명적인 식중독에 걸린다.
버핏은 이 썩은 치즈를 거부하고, 대신 지루하기 짝이 없는 국채시장에 머물렀다. 정확히 말하면 만기 3개월 이내의 초단기 국채(T-Bills)를 직접 보유하거나, ‘리버스 레포(Reverse Repo)’를 통해 현금을 굴리는 방식이다.
심층 분석: 왜 그냥 국채를 안 사고 ‘리버스 레포’였나?
많은 사람이 여기서 의문을 가진다. “안전하게 하려면 그냥 미국 단기 국채(T-Bills)를 사두면 되지, 왜 굳이 복잡한 리버스 레포를 했을까?” 여기에는 수조 원을 굴리는 거인만이 아는, 미세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첫째, 일반 국채 투자는 내가 채권을 ‘소유’하므로, 가격이 떨어지면 내 손해다. 하지만 리버스 레포는 은행이 내일 아침 정해진 가격(원금+이자)에 되사기로 한 ‘계약’이다. 국채 가격이 반토막이 나도 은행은 약속한 돈을 갚아야 한다. 가격 하락의 위험은 전적으로 은행이 진다.
둘째, ‘마진 콜(margin call)’이라는 강력한 방어벽이 있다. 만약 밤사이에 국채 금리가 급등해 담보 가치가 하락하면 어떻게 될까? 버핏은 즉시 은행에 “담보가 부족하니 현금이나 국채를 더 가져오라”고 요구할 수 있다. 이를 마진 콜이라 한다. 은행이 이를 이행하지 못하면 버핏은 즉시 담보를 처분해 원금을 회수한다.
셋째, ‘코끼리 사냥’을 위한 즉시 유동성이다. 버핏에게 현금은 투자가 아니라 ‘탄환’이다. 내일 당장이라도 거대한 기업(코끼리)을 인수할 기회가 오면 수십조 원을 즉시 지급해야 한다. 리버스 레포는 하루짜리 계약이므로, 계약을 갱신하지 않으면 다음 날 아침 바로 현금이 손에 들어온다.
즉 버핏은 수익률이 쥐꼬리만 하더라도 “가격 변동 위험을 상대방에게 전가하고, 나는 원금과 유동성만 챙기는” 가장 안전한 현금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리버스 레포시장에서 웅크리고 있었던 것이다.
결과와 출구: 22억 달러의 승리와 ‘보유 비용’
그렇다면 쥐꼬리만 한 이자를 견디며 지킨 현금(레포) 말고, 앞서 언급한 120억 달러 규모의 외환 베팅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버크셔 해서웨이는 이 외환 포지션을 통해 약 22억 달러(한화 약 3조 원)가 넘는 막대한 이익을 거뒀다. 레포시장에서는 원금을 철통같이 방어하고, 외환시장에서는 구조적 기회를 노려 대박을 터뜨린 것이다. 하지만 수익금보다 더 놀라운 것은 그가 시장을 떠나는 타이밍이었다.
2005년이 되자 미국의 금리가 오르기 시작했다. 이는 달러를 보유하면 이자를 더 많이 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반면 유로화를 보유하면 상대적으로 손해가 된다. 버핏은 이를 ‘보유 비용(negative carry)’이라 불렀다.
“이익을 낼 확률이 비용보다 낮아지면 미련 없이 떠납니다.”
그는 달러 약세라는 거시적 관점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봤지만, 포지션을 유지하는 데 드는 이자 비용(negative carry)이 늘어나자 가차 없이 짐을 쌌다. 수익 앞에서도 취하지 않고 냉정함을 잃지 않는 기계적인 원칙, 이것이 그를 전설로 만든 진짜 이유다.
마치며: 2025년, 다시 썩은 치즈를 경계하며
2002년 버핏의 대전환이 지금 우리에게 주는 울림은 강력하다. 현재의 세계 경제 또한 막대한 부채와 재정 적자의 늪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버핏은 미래를 맞히는 점쟁이가 아니었다. 대신 그는 명백한 구조적 위험이 보일 때는 과감히 보험을 들었고, 모두가 고수익이라는 썩은 치즈를 탐할 때는 바보처럼 보일지라도 안전한 ‘리버스 레포’를 택했다. 그리고 비용이 이익을 넘어서려는 순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시장은 오늘도 우리에게 “지금 안 사면 늦는다”고, 혹은 “이 정도 위험은 괜찮다”고 속삭인다. 그때마다 버핏의 2002년을 기억하라. 투자의 승패는 예언이 아니라, 냄새나는 치즈를 거절하고 차가운 원칙을 지키는 용기에서 결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