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 단상] 단타의 나라에서 장기 투자의 나라로

시장에 난무하는 소음 속에서 중심을 잡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럴수록 기본에 집중하고 올바른 원칙을 지켜야 하지만 우리가 마주하는 현실은 녹록지 않습니다. ‘투자 단상’은 현직 펀드매니저가 시의적절한 고민을 함께 나누는 코너입니다. 투자 대가들이 역경을 이겨낸 방법을 소개하고 실패 사례에서 배우는 기회도 마련하겠습니다. ― 버핏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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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후반 대학생 때 처음 주식 투자를 접하고 2006년 운용업계에 발을 들인 입장에서 한국 증시의 과거를 회상해봅니다. 1997년 외환위기 직후의 폐허,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2011년 ‘차화정(자동차-화학-정유 중심의 랠리)’ 붕괴, 2020년 코로나19 패닉까지 굵직한 사이클을 모두 통과하며 지켜본 한국 증시는 오르면 팔고 빠지면 사는 ‘단타’가 정석처럼 여겨지는 시장이었습니다. 글로벌 경기를 많이 타는 사이클 산업 위주인 데다가, 일반 주주에 대한 대주주의 인식이 바닥이었기 때문입니다. 남들이 공격적일 때 한발 물러서고, 보수적일 때 공격적이어야 한다는 말은 한국 증시에 아주 잘 어울리는 말이었습니다.

사이클이 하강하는, 소위 물이 빠지는 시기에는 앞다퉈 침몰하는 배에서 뛰어내리기 바빴습니다. 개인이나 기관이나 외국인이나 할 것 없이 말입니다. 주가가 빠지기 시작하면 전고점의 반토막을 넘어 마이너스 70~80%까지도 쉽게 추락하곤 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변동성 상황에서 장기 투자를 이야기하면 조롱이 쏟아졌습니다.

씁쓸한 풍경은 따로 있었습니다. 대주주들이 그 바닥 시기를 상속·증여에 절호의 찬스로 활용한 것입니다. 주가가 낮을수록 증여세 부담이 가벼워지니, 일부러 주가가 빠지길 기다리거나 빠지도록 방치한다는 의심까지 받았습니다. 일반 주주들의 재산권은 한낱 환상에 불과했습니다. 그 시절을 회상하면 과연 한국에 자본시장이 존재했나 싶기도 합니다.

따라서 사이클이 있지만 꾸준히 장기적으로 우상향하는 미국 주식에 대한 로망이 싹트는 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특히 주가가 빠지는 시기에 미국 기업들이 보여준 모습은 인상적이었습니다. 잉여현금흐름의 상당 부분을 자사주 매입과 소각에 투입해 적극적으로 주가를 방어한 것입니다. 자사주를 소각하면 발행주식 수가 줄어들어 주당 가치가 자동으로 올라갑니다. 주가가 빠질 때 기업이 직접 자기 주식을 사들여 없애주니, 주주 입장에서는 든든한 동반자가 곁에 있는 셈이었습니다.

미국 주식의 주주들은 그런 경영진과 대주주를 믿고 하락기를 버텨냈고, 다시 오는 상승기를 맞이하면서 자산 규모가 크게 도약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미국 주식은 장기적인 자산 증식 수단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주식이 장기 자산으로 기능하는 것은 주가를 구성하는 요소로도 설명이 가능합니다. 주가는 간단히 이익과 멀티플로 설명됩니다. 사이클 하락기에는 이익이 줄어드는 것이 자연스러운 수순입니다. 그러나 이때 멀티플이 유지되거나, 이익이 줄어드는 속도보다 덜 빠진다면 주가는 그만큼 방어가 가능해집니다.

멀티플은 흔히 ‘성장성’을 대표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성장성이 좋으면 멀티플이 높고, 그렇지 않으면 멀티플이 낮다는 식입니다. 하지만 멀티플은 단순한 성장성보다 그 기업의 투하자본이익률(Return on Invested Capital, ROIC)과 연관성이 훨씬 큽니다. ROIC는 기업이 사업에 투입한 자본 대비 얼마나 효율적으로 수익을 만들어내는가를 보여주는 지표입니다. 성장성도 결국 ROIC를 구성하는 요소에 불과합니다. 성장이 아무리 빨라도 그 성장을 만들어내기 위해 더 많은 자본을 비효율적으로 쏟아부어야 한다면, ROIC는 오히려 떨어지고 멀티플도 함께 무너집니다.

거꾸로 말하면, 성장성이 낮아지더라도 주주환원을 늘려서 ROIC를 방어해준다면 멀티플은 크게 빠지지 않습니다. 기업이 사업에 효율적으로 쓰지 못할 만큼 많은 현금을 안고 있다면, 그 돈을 비효율적인 사업 확장에 묶어두는 것보다 자사주를 사서 소각하거나 배당으로 돌려주는 편이 ROIC를 끌어올립니다. 쉽게 말해서 주주들이 자신들을 챙겨주는 기업을 장기적으로 믿고 따라가게 되는 것이죠.

과거 한국 증시의 변동성이 컸던 이유 중 하나는 하락기에 ROIC를 누구도 신경 쓰지 않은 것입니다. 이익이 빠지면 멀티플도 같이 무너지니, 주가가 산술급수적이 아니라 기하급수적으로 무너지는 구조였던 셈입니다.

이제 그런 흐름은 바뀌었다고 봐도 무방할 듯합니다. 2025년 7월 공포된 개정 상법에서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에 ‘주주’가 명시적으로 포함되었습니다. 사외이사는 ‘독립이사’로 명칭이 바뀌며 의무 선임 비율이 3분의 1로 상향되었고, 감사위원 선임에서는 3%룰이 강화되었습니다. 자본시장법 차원에서도 합병과 분할처럼 주주 이익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거래에 대한 규제가 정비되고 있습니다. 우리 기업들도 주주들의 재산권을 한층 깊이 있게 인식하기 시작했고, 자사주 소각 같은 적극적인 주주환원에 나서는 곳이 빠르게 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익 하락기에 주가가 빠지지 않는다는 말은 아닙니다. 이익이 줄면 그만큼 주가가 조정받기 마련이죠. 다만 기업들이 적극적으로 주주환원에 나서서 멀티플 하락을 방어해준다면, 과거처럼 주가가 반토막 이하로 폭락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장기 주주들이 구성되면서 주가 변동성이 크게 줄어드는 효과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최근 1년간 급격하기는 하지만 한국 증시의 성격이 변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최근의 급등은 글로벌 AI 업황의 중심에 한국이 자리하면서 이익이 급증한 영향이 가장 큽니다. 그러나 주주권에 대한 인식 변화와 쏟아져 나오는 환원 정책들은 한국 증시의 전체적인 멀티플을 한 단계 끌어올렸습니다. 앞으로도 이런 경향은 상당 기간 유지될 가능성이 큽니다.

이제 한국 증시에 투자하는 이들도 고점과 저점에 대한 치열한 고민을 내려놓고 장기적 관점에서 비즈니스를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과도한 쏠림이나 기대가 반영된 주가는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여전히 한국 시장은 업황 사이클이 심한 비즈니스가 많고 변동성도 큽니다. 그리고 3차에 걸친 상법 개정과 한두 해의 흐름만으로 수십 년간 굳어진 관행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단정하기는 이릅니다. 일부 기업의 환원은 진심이 아니라 흉내일 수 있고, 정책의 후퇴 가능성도 늘 열려 있습니다.

그러나 주주권을 보호하는 법안과 기업들의 의지를 믿고 해자가 뚜렷한 기업들에 장기 투자한다면, 단타 투자자보다 더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는 시장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장기 투자자들이 그토록 바라던 미국 시장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그토록 부러워하던 시장이 우리 앞에 펼쳐지고 있습니다. 이번엔 조롱받지 않고 끝까지 들고 갈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 버핏클럽의 모든 글은 특정 종목에 대한 매수·매도 추천이 아닙니다. 투자 판단에 대한 모든 책임은 투자자 본인에게 귀속됩니다.